황병기작곡 가야금독주곡 '비단길'
" 실크로드를 따라 펼쳐지는 신라적인 환상 "
그는 늘 끝없는 호기심과 실험정신으로 새로운 음색을 개척해 왔다. 최초의 작품 [숲]에서 시작된 이 탐색은 [침향무]와 [비단길]에 이르러 뚜렷한 결실을 보았고, 가야금과 인성(人聲)을 위한 [미궁]에서는 극도의 실험적인 작업을 거쳐 전인미답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였다.
황병기의 작품은 음색이 매우 중요시 되며 어느 누구의 작품보다 색채적인 경향을 띄고 있다. 따라서 황병기의 작품은 한 폭의 그림과 같다. 그 그림 속에는 비 오는 정경이 있고 달빛이 비치는 정경이 있으며 녹음 속의 새소리가 들리고 벌판을 내닫는 말발굽소리도 들린다.
또 그런가 하면 그 속에는 기대와 설렘, 불안과 두려움, 슬픔과 기원, 기쁨과 환희의 마음이 그려져 있다. 이들 각각의 그림들은 서로 다른 색채와 질감을 갖고 있으나, 동양의 산수화에서 나무와 산과 집이 뿌연 안개에 감싸여 있듯 가야금의 신비롭고 환상적이며 관능적인 색채로 부드럽게 감싸져 있다.
그러면 황병기의 가야금 독주곡 [비단길]을 감상해 보도록 하자.
가야금 독주곡 [비단길]은 황병기가 1977년에 작곡한 곡이다. 신라미에의 동경과 범아시아적인 악상을 가다듬어 작곡된 [비단길]은 '신라 고분에서 발견되는 페르샤 유리그릇의 신비로운 빛'에서 작곡 동기를 얻었다고 전해진다.
또 [비단길]이라는 악곡명은 '고대 동서 문물이 교역되던 통로의 이름이면서 신라적인 환상이 아득한 서역에 까지 펼쳐지는 비단같이 아름다운 정신적인 길'을 상징한다.
[비단길]은 황병기의 초기 작품에서 보이는 단순한 짜임새에서 벗어나 보다 복잡하고 다양한 구성을 보인다. 모두 4장으로 되어 있고 가락은 '미, 솔, 라, 도, 레'의 5음 위에 '파'와 '시'가 첨가된 독특한 7음 음계로 되어 있다.
제 1장은 매우 느린 빠르기의 선율로 시작되며 곧 신비로운 화음을 잇달아 연주한다.
이 화음군은 제 1장과 제 4장의 끝 부분에 다시 나타나면서 곡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이끌어 가는 중요한 구실을 한다. 신라적인 미와 서역적인 미에의 깊은 동경을 나타내는 듯한 이 화음군은 잔잔한 슬픔에 젖어 가락적인 변화를 꾀해 간다.
가야금의 낮은 네 개 현을 세 손가락의 손톱으로 일시에 내리쳐 나는 '샤르락'하는 장쾌한 소리에 이어 화음군은 다시 단선율로 바뀌고 충분히 전개된 다음 단속적인 빠른 4연음이 나타나 불안감을 조성한다. 이러한 불안감속에 스타카토(staccato)로 이루어진 특징적인 음형이 점점 크게 연주되면서 긴장감을 고조 시킨다. 이때 장구는 채편을 손바닥으로 두드려 대면서 위협적인 소리를 낸다.
이 관능적이기 조차한 선율이 끝나면 제 1장의 처음에 연주된 신비로운 화음을 다시 연주하면서 조용히 제 2장을 기다린다.
제 2장은 빠른 4박자의 단모리가락으로 되어 있다.
이 리듬은 가야금 산조에 바탕을 둔 것으로 오른손의 빠른 분산화음 속에 낮은 성부의 가락이 뚜렷이 들린다. 가락은 차츰 높은 음역으로 진행하면서 힘을 더하고 다양한 분산화음은 천변만화하는 색채의 파노라마를 이룬다. 이 부분의 진행은 가히 눈이 부실 정도이다.
곡은 더욱 높은 음역으로 고조되어 미분음으로 미끄러지면서 5잇단음의 리듬과 화음으로 이루어진 부분이 빠르고 격렬하게 연주된다. 이 가락은 더욱 휘몰아치면서 절정을 이루고 갑자기 끝난 다음 정막 속에 제 3장이 시작된다.
제 3장은 낮은 음역의 화음과 높은 음역의 고요한 선율로 이루어저 있다. 여기에서 짧게 스타카토로 끊는 화음과 부드러운 선율은 묘한 대조를 이룬다.
제 3장의 중간부에는 뒤뚱거리는 듯한 낮은 음부의 음형이 고음부의 한가로운 선율과 함께 나타난다. 호젓한 실크로드의 산길을 뒤뚱거리며 여유 있게 걸어가는 나귀의 모양새를 나타낸 듯 하다. 그 율동은 제 1장의 중간부에 나오는 5잇단음의 리듬으로 이루어진 부분과 닮은 데가 있다. 곧이어 처음의 고요한 선율이 다시 반복된 다음 제 4장이 시작된다.
제 4장은 매우 음산하고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갖는다. 가야금의 높은 현에서 트레몰로(tremolo)가 시작되면 저음부의 음산하고 을씨년스러운 아르페지오(arpeggio)가 네 번 울리고 장구의 위협적인 연타에 힘입어 저음부가 폭풍처럼 휘몰아치면서 고조되어 끝난다. 이때 저음부의 아르페지오는, 가야금 줄을 받치고 있는 기러기 발(雁足)을 중심으로 우측의 줄을 뜯지 않고 좌측의 불규칙한 음정으로 된 줄을 뜯어서 소리 낸다.
한 차례의 폭풍이 지나간 뒤에 제 1장의 신비롭고 환상적인 화음이 조용히 재현되면서 깊은 여운 속에 곡이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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