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훈 작곡 / 국악관현악과 사물놀이를 위한 '신모듬'
" 소리로 표현한 민중의 한과 신명 "
음악사의 흐름을 유심히 살펴보면 그 이면에는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들의 실험정신과 뜨거운 신념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작곡가 박범훈을 보면서 우리는 그러한 실험정신과 의지를 느끼게 된다.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와 중앙대학교에서 피리와 작곡을 공부하고 다시 일본 무사시노(武藏野) 음대에서 작곡과 지휘를 공부한 그의 경력은 출발부터 범상치 않은 느낌을 준다. 그는 1987년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국악관현악단인 중앙국악관현악단을 창단하여 1995년 국립국악관현악단 초대 단장으로 부임하기 전까지 10여 년 간 중앙국악관현악단을 이끌면서 창작국악 발전의 큰 견인차 역할을 해왔다.
또 그가 1994년 중국과 일본, 한국의 민족 악단으로 구성된 아시아 민족 악단을 창단하여 아시아 민족음악의 발전을 모색한 것이나 국립국악관현악단 단장으로서 주위의 비난을 무릅쓰고 악기 개량을 강력히 추진하여 국악 관현악단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한 것은 그가 단순한 한 작곡가로서의 삶이 아닌 민족음악의 새로운 역사를 개척하는 음악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확신을 느끼게 해준다.
" 국악 관현악을 위한 최초의 사물놀이 협주곡 "
그런 의미에서 '국악관현악과 사물놀이를 위한 신모듬' 역시 그가 늘 주창해 온 국악의 생활화와 세계화를 앞당기기 위한 그의 신념이 짙게 배어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1986년에 작곡된 이 곡은 국악 관현악을 위한 최초의 사물놀이 협주곡으로 창작국악의 대중화 가능성을 처음으로 열어 보인 기념비적인 작품이라 하겠다. 이 곡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민속음악 어법에 바탕을 두고 있다. 무악과 농악의 장단들이 두루 사용되고 있으며 이것이 이 음악이 갖고 있는 흥과 신명의 원천이 되고 있다.
이들 장단들은 국악 관현악과 만나면서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장단이 갖고 있는 역동성과 신명성을 더욱 증대시키면서 국악관현악과의 성공적인 만남을 이루어 내고 있다. 즉, 사물놀이와 국악관현악이 서로의 본질을 북돋워 주는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 곡의 전체적인 형식은 우리의 전통음악인 농악의 형식을 따르고 있어 장단을 중심으로 곡이 전개된다. 이것은 주제의 전개와 발전에 따라 형식을 이루는 서양음악과는 다른 양상이다. 따라서 작곡자는 선율의 내적인 통일성보다는 장단의 독특한 구성에 더 역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에 사용된 장단들의 대부분이 농악이나 무악에서 늘 연주되어 오던 것이긴 하나 이들 장단을 어떻게 배열해서 전체적인 틀거지를 짤 것인가는 전적으로 작곡자의 독창적인 역량에 달려있다. 이 곡의 장단구성은 듣는 사람의 주의력을 계속 붙잡아 둘 만큼의 신선함과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다.
" 태평소와 사물놀이 가락으로 표현한 민중적 활력 "
작곡자는 작품 전체에 통일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주제 선율을 다양하게 변주하고 있는데 이 가락은 경기이남 지역의 무악에서 따온 것으로 곡의 첫머리에 제시되어 곡이 진행되는 동안 때로는 밝고 희망찬 모습으로, 때로는 어둡고 슬픈 모습으로 변형되어 나타난다.
이 곡의 가장 큰 장점은 전곡을 통하여 나타나는 민중적인 활력이라 할 것이다. 전통적인 민속악 장단의 힘찬 역동성에 바탕을 둔 이러한 민중적 활력은 주로 태평소와 사물놀이의 신명난 가락으로 표출된다. 이 신명은 전통적인 민속음악의 핵심을 이루는 것으로 삶의 온갖 애환과 질곡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며 지루한 일상적 삶에 활력을 불어 넣어주는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사물놀이는 이 곡에서 특유의 즉흥적 속성을 충분히 발휘하면서 관객들의 잠재된 음악성을 일깨워 주며 그 순간 관객과 연주자들은 하나가 되어 집단적인 신명에 빠져든다. 이 곡의 대중적인 속성이 최고로 발휘되는 지점이 바로 이 부분이다.
“ 45분짜리 대곡으로 풍장, 기원, 놀이의 세 거리로 구성 "
이 곡은 모두 세 거리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거리 '풍장', 둘째 거리 '기원', 셋째 거리 '놀이'로 연주시간 약 45분의 대곡이다.
첫째거리 '풍장'은 느린 도입부로 시작된다. 나발이 울리고 태평소가 이 곡의 주제 선율을 드높이 노래하면 관현악이 이를 받아 전개하면서 도입부를 마친다.
이어 사물이 차례로 변박을 연주하는데 이 장단은 2분박과 3분박이 복잡하게 얽힌 호남 우도농악의 장단으로 약간 느리게 연주된다.
사물놀이가 이 장단을 전개해 가면 다시 태평소가 이 곡의 주제 선율을 노래하고 이어 동부지방의 메나리조로 된 활달한 가락을 관현악과 함께 연주하면서 첫 번째 부분을 마치게 된다.
첫째거리의 두 번째 부분은 힘차고 빠른 5박자의 리듬으로 시작하는데 역시 호남 우도농악 장단이다.
사물놀이에 이어 관현악이 가세하고 태평소가 다시 주제 선율을 드높게 노래하면서 곡이 크게 고조되었다가 조용해지면서 관현악이 주제 선율을 약간 애조를 띠고 아름답게 연주한다.
첫째거리의 세 번째 부분은 장고의 단조로운 6박 장단(웃다리 풍물가락)으로 시작하여 다른 타악기들이 서서히 가세하며 이어 관현악의 느릿하고 흥겨운 반주에 맞추어 합창이 불려진다. 같은 선율을 여럿이 부르는 제창의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곳이다. 노래가 끝나면 빠른 굿거리장단이 사물로 연주되고 태평소의 높은 외침과 관현악의 포효에 이어 사물이 독주를 하면서 뜨겁게 달아오르면 전 관현악이 함께 울리면서 첫째거리는 끝난다.
둘째 거리 '기원'은 정주의 기분 나쁜 울림과 관악기의 괴기적인 울림이 무서운 분위기를 자아내다. 사물놀이의 무속적인 리듬에 실려 구음이 노래되는데 이 가락은 애절함과 함께 간절한 기원을 담고 있는 듯하다. 분위기가 다시 밝아지면서 이번에는 사물놀이의 독주가 엇모리로 연주되는데 이 부분의 폭발력은 가히 압권이다. 사물놀이가 멀어져 가면 다시 구음이 노래되면서 둘째 거리를 조용히 마친다.
셋째거리 '놀이'는 처음 태평소가 이 곡의 주제 선율을 노래하고 이어 빠른 12박의 자진모리 가락이 연주되는데 이 가락의 흥겨움은 절로 어깨를 들썩이게 한다. 이 가락은 사물놀이의 독주에 의해 전개된 다음 휘모리로 연결된다.
매우 빠른 4박자의 휘모리 부분은 꽹과리의 강한 연타로 시작한다. 이 휘모리의 흐름은 거대한 춤의 물결을 연상시킨다. 흥과 신명이 크게 부풀어 오르고 이를 사물놀이 독주가 더욱 고조시키면서 곡은 마지막 정점을 향해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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