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길 작곡 '8주자를 위한 추초문'
" 시나위 정신의 새로운 구현 "
보통 '창작국악'하면 국악 작곡가들의 전유물처럼 생각하기 쉬우나 요즘은 양악 작곡가들도 창작국악을 자주 발표하는 시대가 되었다. 국악관현악과 합창을 위한 <만수산 드렁칡>을 작곡한 이건용이나, 사물놀이와 국악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풍물>을 작곡한 강준일을 비롯하여, 이종구, 박동욱, 신영순 등 많은 양악 작곡가들이 국악곡을 발표해 왔다. 이병욱, 김대성 등은 양악작곡가로 출발했으나 활발한 국악창작으로 오히려 국악작곡가로 더 유명해졌다.
김정길 역시 주로 양악 작곡가로서 활동해 왔으나 <8주자를 위한 ‘추초문’>이라고 하는 기념비적인 작품을 통하여 창작국악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기고 있다.
" 새로운 감각의 '동부제 시나위' "
김정길은 이 곡에서 국악기를 단순히 하나의 음향 소재로만 사용하는 데서 벗어나 국악의 본질적인 측면에 접근하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다. 말하자면 국악기를 서양음악 적인 시각에서만 파악하려 하지 않고 국악의 구조적인 틀 속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이 곡의 구석구석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곡이 창작 국악사에서 돋보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지점들 때문이다. 김정길은 이 곡을 통하여 시나위의 정신을 새롭게 구현해내고자 하였다. 시나위가 갖고 있는 깊은 예술성을 닮으면서도 오늘의 새로운 감각을 갖고 있는 신 시나위를 만드는 것이 바로 김정길이 추구하고자 했던 바였다.
시나위는 잘 알다시피 일정한 장단과 음계 구조 속에서 각 악기의 특성을 최대한 살려 즉흥적으로 연주해 가는 독특한 국악 양식의 하나이다. 그 음계 구조가 남도민요의 선법을 따를 때는 남도시나위가 되는 것이요, 경기민요의 선법을 따를 때는 경기시나위가 된다.
김정길은 그러나 남도제도 아니고 경기제도 아닌, '미, 솔, 라, 도, 레'의 동부제 시나위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 5음 음계는 곡의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성 있게 유지되면서 곡 전체에 통일성을 부여하고 있다. 또한 양금이 일정한 템포를 계속 유지함으로써 장단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 강렬함을 끌어안는 단순함 "
이러한 전체적인 틀 속에서 단소와 대금, 피리, 해금, 아쟁, 양금과 훈, 그리고 징 등 모두 8개의 악기들이 각기 주어진 음정 속에서 자유로운 리듬으로 즉흥적인 선율을 연주해 간다. 연주자들은 자신이 연주하는 악기의 특성을 전체의 틀 속에서 최대한 발휘해 나갈 수 있다.
'추초문'을 처음 듣는 사람은 끝없이 흘러가는, 선율의 유장함에 놀란다. 처음부터 끝까지 빠르기도 변화가 없어 성질 급한 사람은 답답해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이런 느린 빠르기는 전통음악에 있어서는 흔한 일이다. 오히려 이 정도 빠르기는 빠른 편에 속한다. 느리고 여유 있는 빠르기에서 나오는 섬세한 음색의 변화와 강약의 미묘한 농염은 빠른 곡에서 느낄 수 없는 색다른 음악적 감동을 안겨준다.
'추초문'은 긴 시간 연주되면서도 정작 이를 기록한 악보는 앞뒤 두 장에 불과하다. 또 그 악보라는 것도 간단하기 이를 데 없다. 앞장에는 악기 배치도와 연주 순서를 적은 도표가 전부이고, 뒷장에는 각 악기별로 몇 개의 음정 패턴만을 오선보에 그려 놓았을 뿐이다. 아마도 복잡하고 어려운 악보를 최고로 치는 사람들에겐 여간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추초문'은 악보가 단순한 만큼 음악 또한 단순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나 그 단순함은 오히려 표현의 강렬함을 수반하고 있다. 본질의 핵심을 찌르는 표현의 단순화는 한국적인 미의식의 가장 중요한 부분 중의 하나이다.
'추초문'을 듣노라면 그 음악 속에 깊은 슬픔이나 한(恨) 같은 것이 서려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느낌은 '추초문'의 음계 구조가 동부지방의 상여소리 음계 구조와 비슷하고, 또 양금의 느린 템포가 상여 행렬의 느린 움직임을 연상시키는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슬픔과 한(恨)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고 내면에서 타오른다.
" 양금으로 시작해 아쟁 가락으로 끝맺어 "
'추초문'의 전체적인 구성은, 악기가 하나씩 나타났다가 다시 하나씩 사라지는 간단한 구조로 되어 있다. 당연히 악기가 모일 때는 점점 소리가 커졌다가 하나둘 사라질 때는 차츰 소리가 작아진다. 나타나는 악기의 순서도 음량의 세고 여림에 따라, 또 음색의 차이에 따라 다르다. 대체로 여성적이고 섬세한 악기가 먼저 등장하고, 남성적이고 웅장한 악기는 나중에 나오도록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는 각 악기의 음색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한다.
'추초문'은 맨 처음 양금의 맑고 영롱한 소리로 시작된다. 이 선율이 전개되고 나면 곧이어 훈이 가세하는데, 이 악기는 입으로 불어 소리를 내는 악기로 매우 어두운 음색을 갖고 있다. 이번에는 풍경소리가 스산하게 들리는 가운데 단소가 맑고 고운 음색으로 높은 음역의 가락을 연주한다.
단소 다음에 나오는 악기는 아쟁이다. 낮은 음역의 선율을 장중하고 애절한 음색으로 연주한다. 이어 해금과 대금이 차례로 연주되면서 곡은 차츰 부풀어 오르고, 마침내 피리소리가 드높게 연주되면 징이 가슴속에 맺힌 한(恨)을 풀어 내리듯 크게 울린다. 이 곡의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부풀어 올랐던 곡은 이제 악기가 하나씩 사라지면서 점점 작아진다. 먼저 징 소리가 사라지고, 이어 피리, 해금, 단소, 양금, 훈 등의 순으로 서서히 사라진다. 악기의 수가 줄어들수록 남은 악기의 음색이 더욱 아름답게 들린다. 이제 풍경소리가 다시 은은히 울려 퍼지고 아쟁가락이 나지막이 들리면서 곡은 조용히 끝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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