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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상위시대를 꿈꾸는 국악인, 가야금연주가 김일륜

국악사랑 2006. 10. 27. 09:42

 

 

                    “ 여성 상위시대를 꿈꾸는 국악인 ”

 

          

김일륜씨를 내가 처음 만난 것은 89년 4월경인데 이때 그는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단원으로 재직하고 있었고 나는 기획위원으로 새로 발령을 받았었다.

 

당시에 김일륜씨는 단원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존재였는데 특히 가야금 주자로서 민속음악 연주에는 따라갈 사람이 없었다. 게다가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의 자체연주회 외에 외부출연을 가장 많이 하는 단원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지금도 그가 외부출연 신청서를 일주일이 멀다하고 제출하던 모습이 생생하다).

 

당시에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의 자체 공연회수가 연 30회 정도였는데 그의 외부출연회수도 거의 이 정도에 육박해서 연 50~60회의 연주회를 소화해내는 무서운 활동력을 보였다.

 

악단에서는 그의 이런 활동력을 두고 ‘웬 여자가 그렇게 욕심이 많냐고’ 혀를 내둘렀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연주회수에도 불구하고 하나하나의 연주회를 그냥 넘기는 법이 없었다.

 

보통 가야금 산조를 연주회에 올릴 경우 혼자서 오랫동안 연습을 한다음 연주회에 닥쳐서 장고 주자와 몇 번 호흡을 맞춰보는 정도로 준비를 끝내는데 그는 이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연주회 몇 달 전부터 장고 주자와 함께 살다시피 하면서 두 사람의 호흡을 맞추고 가락을 다듬어 나간다. 그만큼 돈과 노력이 투자됨에도 이를 마다하지 않는 것이 그의 성격이다.


김일륜씨가 악단을 그만둘 때까지 특별히 신경을 쓴 일이 하나 있다. 그것은 그가 악단연주회에서 가야금을 연주할 때 그의 가야금 소리를 잘 들리도록 배려하는 일이었다.

 

국악기 소리는 보통 좁은 장소에서는 문제가 없지만 공연장 같은 넓은 공간에서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마이크를 쓰게 마련인데 이 마이크가 국악기에 맞는 것이 개발되지 않아서 늘 말썽이었다.

 

국악기가 갖고 있는 독특한 음색이나 여운이 일단 마이크를 통과하면 변색이 되고 맛이 살아나질 않는다. 그러다 보니 연주자는 늘 자신의 소리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데 대한 불만이 클 수밖에 없다.

 

게다가 공연장의 음향 담당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음악에 대한 전문적인 식견이 없는 사람들이어서 음향상태가 고르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악단에서도 이 부분에 많은 신경을 쓰게 되는데 김일륜씨는 연주단원임에도 이 문제에 ‘유난히’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자신이 연주하는 가야금 소리가 100% 관객에게 전달되기를 요구했다. 그래서 악단에서는 그의 가야금소리가 잘 들리도록 우선적으로 마이크를 조절해 놓고 다른 악기들을 여기에 맞추어 조절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이러한 예들을 그가 모든 것을 완벽하게 처리하고 싶어하는 성격의 소유자임을 보여준다.

 

그는 가야금 연주 뿐만 아니라 노래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다.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이 국악대중화의 일환으로 매년 시도해온 ‘국악가요의 날’ 공연에서 그는 이병욱의 새로운 노래들을 시원한 국악창법으로 불러 호평을 받았다.

 

 그의 노래실력은 그가 동인으로 활약해왔던 국악실내악단 ‘어울림’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어울림의 노래 곡들은 대부분 그의 입을 통해 불려졌다. 그가 부르는 노래들은 주로 고려가요나 신라향가, 백제가요 등 옛 노래들을 가사를 그대로 살리고 여기에 서정적인 선율을 가미해서 만든 곡들이다. 말하자면 옛 것과 현대적인 것을 접목시켜 만든 곡들이다.

 

그의 이러한 노래실력은 갑자기 생겨난 것은 아니다. 초등학교 가기 전부터 판소리, 무용 등을 배웠고 국립국악원에 가야금 병창 연주자로 입단하기 전까지 박귀희 선생한테서 가야금병창을 전수받았다. 이러한 음악수업이 그의 노래에 있어 바탕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그의 노래는 탄탄한 리듬감과 국악적인 시김새, 시원스럽게 쭉 뻗는 발성이 한데 어울려 독특한 분위기를 이룬다.

 

그의 노래는 여러개의 CD로 출반되어 있다. ‘어울림 3, 4, 5집’ 등의 이름으로 출반된 곡집에서는 그의 독특한 창법으로 불려진 노래들을 만날 수 있다.


김일륜씨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그가 주 멤버로 활약하고 있는 서울새울가야금 삼중주단이다. 이 중주단은 한국 최초의 가야금 삼중주단으로 고음과 중음, 저음의 세 가야금으로 구성되어 있다.

 

91년 같은 서울대 동문인 김해숙, 박현숙, 김일륜 세 사람이 모여 창단한 이 중주단은 새로운 창작음악을 작곡가들에게 위촉, 발표하여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새로운 가야금 연주기법과 음역이 다른 세 가야금의 완벽한 앙상블은 이후 가야금음악의 발전에 큰 활력소가 되었다.

 

이 중주단은 공연뿐 아니라 연주집 발간, CD출반 등 활발한 활동을 계속적으로 펼쳐왔다.

 

그는 이 같은 단체 활동 외에도 개인 독주회를 개최하고 한국작곡가회와 신악회, 미래악회의 작품연주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숫한 해외공연을 다녀왔다.


그의 가야금연주는 전반적으로 힘이 있고 농현이 깊으며 긴장과 이완에 능숙하다는 평을 듣는다.

 

그의 가야금 연마는 어렸을 때 성금련류 가야금산조를 배우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신관용류 가야금산조, 함동정월류 가야금산조, 최옥산류 가야금산조, 김윤덕류 가야금산조를 배웠다. 가야금 연주자가 이처럼 많은 가야금산조를 섭렵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의 음악에 대한 욕심과 집념이 어느 정도인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가 ‘94년에 10여 년간 몸담아 온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을 과감히 그만두고 이화여대 대학원에 진학한 것도 공부에 대한 그의 끝없는 욕심 때문이다. 대학원에 진학해서는 연주활동을 최대한 자제하고 배우는데 열중했다. 그의 공부에 대한 열성은 모든 학과목을 올 A로 이수한데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이러한 노력과 집념은 하면 된다는 그의 신조에서 비롯된다. 내가 120%노력해야 관중에게 90%의 전달이 가능하다는 생각에서 한시도 쉬지 않고 공부하는 것이다.


그는 같은 국악을 전공하는 임재원씨와 결혼했다. KBS국악관현악단을 거쳐 서울대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임재원씨는 김일륜씨 못지않게 국악계에서 소문난 실력 있는 대금주자이다. 이들은 KBS-FM ‘국악무대’ 초청으로 부부음악회를 갖기도 했다. 두 사람이 같은 국악을 하다보니 서로 간에 이해도 깊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기도 한다.

 

또 두 사람은 국악실내악단 ‘어울림’의 멤버로도 함께 활약했다. 그러나 이처럼 바쁜 와중에도 그는 가정에서의 아내역활에 충실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워낙 손재주가 있어 음식솜씨도 일품이고 애교도 만점이다. 남편에게 다 잘 할 수는 없지만 최선을 다하려고 항상 노력하고 있다.

 

그는 86년도에 당시로서는 최연소 대학 강사(26살)로 중앙대에 강의를 시작했다. 이처럼 이른 나이에 강사로 나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85년도에 열린 제 1회 동아콩쿨에서 금상을 수상하는 등 일찍부터 발군의 실력을 나타낸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가야금과 노래뿐만 아니라, 아쟁의 명인 박종선선생에게서 아쟁산조 한바탕을 배웠고, 명고수였던 고 김명환 선생으로부터는 장단과 토막소리를 배웠다.

 

그의 음악수업이 이처럼 다양하게 이루어져 온 것은 순전히 그의 음악적 욕심에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모든 것에 겁 없이 도전하는 그의 삶의 방식은 92년에 교통사고를 당한 이후 점차 변하고 있다. 매사에 겸손한 마음으로 대하면서 새로운 일의 추진은 신중하게 결정한다. 그러면서도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마음으로 살아있을 때까지 열심히 살고자 노력하고 있으며 현재는 숙명여대 교수로 교육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김일륜씨를 지켜보면서 나는 주역에서 말하는 음의 시대, 즉 여성상위 시대가 한걸음 다가왔음을 느낀다.

 

억눌리고 고통스러웠던, 과거의 굴종의 역사를 딛고, 당당히 일어서는 여성의 힘찬 모습을 그에게서 발견한다. 그 힘찬 모습은 아름다워 보인다.

 

남녀가 동등한 인격체로서 더불어 사는 사회, 그 평등의 세상이 가까이 온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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