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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만, 전통 민속음악의 부활을 꿈꾼다(3)

국악사랑 2007. 11. 6. 23:42

         최경만, 전통 민속음악의 부활을 꿈꾼다(3)

 

                                                                                                      글 / 이 인원

 

최경만 명인은 예술감독직을 끝으로 국립국악원을 그만둔 후 정화영선생 추천으로 부여충남국악단 단장으로 2007년 2월에 발령을 받았다. 그는 이 곳에서 뭔가 국악인으로서 흔적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 첫 번째 사업으로 서동요를 테마로 한 노래극을 준비하고 있다.

 

서동요는 정화영 선생이 콩트로 20분 정도 되는 분량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있는데 이것을 바탕으로 1시간 10분 분량의 노래극을 만들 예정이다. 예산도 확보되어 제작에 들어갔는데 반응이 좋을 경우 현재 공사 중인 백제 재현단지에서의 상설공연과 전국 순회공연을 생각하고 있다.

 

최경만 명인은 현재 호적음반을 준비 중이다. 농악경연대회 때 호적 부는걸 보면 호적을 아무나 소리만 내면 되는 것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고, 심지어는 여학생들이 기본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부는 것을 볼 때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든다고. 그래서 음반제작과 함께 학생들이 보고 배울 수 있도록 악보도 함께 준비하고 있다. 또 서도소리가 레퍼토리가 다양하고 가짓수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젊은 층들이 잘 모르는 부분이 많아서 이번 기회에 악보화하고 음반화해서 후학들이 쉽게 배울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들은 그가 94년에 민요를 장구반주에 피리만으로 연주해서 음반을 낸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때도 후학들이, 보통 민요음반이 반주에 여러 악기가 나와서 따라 배우기가 힘들다고 해 배우기 쉽도록 피리만으로 음반을 만들었는데 이런 데서도 최경만 명인의 후학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엿볼 수 있다.

 

최경만 명인은 학생들이나 전문가들이나 기본적인 게 안돼 있는 경우가 많아 안타깝다고 한다.


“ 우리가 공부할 때는 항상 김내기부터 했어요. ‘뿌-- 뿌--’하고 구멍을 다 막고 부는 거죠. 그 다음에 손가락 떼고 불고, 그 다음에 더름치고, 더름도 내리더름, 치더름으로 나누어서 하고, 그 다음에 서치기하고 이렇게 기본적인 것을 많이 연습했어요. 처음에 이렇게 연습을 하면 나중에 진도 나갈 때도 잘 나가지만 그게 안 되면 한 두 마디 때문에 진도가 나가지 않아서 참 안타까워요. 그래서 저는 그런 것을 기본으로 시키고 그것이 잘 될 때 다음과정으로 나가요.

 

요즘은 피리소리만 나면 민속악에서 산조로 들어간다든가 정악에서 수연장지곡으로 들어간다든가 해서 바로 진도를 나가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 아무리 기본적인 곡이라 해도 그 속에 피리의 기초적인 기교들(서치기 같은)이 다 나오는데 그게 안 되면서 바로 하거든요. 그게 문제예요. 학생들이 문제가 아니라 가르치는 사람들이 어떻게든 그것을 가르쳐야지요. 산조나 민요나 서치기를 하는데 그게 잘 안되면 맛이 안나요.

 

우리가 공부할 때는 민속음악의 전반적인 것을 다 배웠어요. 대영산에, 취타풍류에, 민요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굿집에서 하는 음악도 다 배웠어요. 그런데 요즘은 중학교에서 피리를 불어서 대학원 졸업하도록 계속 똑같은 산조만 부는데, 그렇게 오랫동안 불면 엄청 잘 불어야하는데 그렇질 못해요. 기본적인 표현이 잘 안되는 경우가 많거든요.

 

또 안타까운 것은 우조나 계면조나 거기에 따른 표현법이 다 따로 있는데 이것을 똑같이 흔들어서 연주해요. 물어보면 그런 게 있느냐고 하죠. 참 답답해요. 기본적인 것을 튼튼히 해야 어떤 것을 연주하든지 그 곡을 소화시킬 수 있는데 그것이 안 되니까 어려움이 많죠.“


최경만 명인은 민요반주의 경우 민요를 가사는 몰라도 선율만이라도 구음으로 자꾸 불러봐야 반주실력이 는다고 말한다. 시나위의 경우는 경험이 중요하며 연주할 때 자기의 갈 길을 가다가 남의 악기소리도 흉내 내서 가면서 여러 악기와 자꾸 어우러져 봐야 자신도 모르게 느낄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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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만 명인의 피리소리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 하청에서 소리를 낼 때는 어딘지 모르게 무게가 있고 상청에서 소리를 낼 때는 예쁘면서도 예리한 요성이 특징이다. 대개 민속악을 하시는 분들의 피리소리가 가벼운 느낌을 많이 받지만 최경만 명인의 피리소리는 정말 무거운 느낌을 준다. 또 상청에서 서쳐서 올린다음 다시 흔들어서 내는 소리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 윗소리에서의 요성은 턱으로만 해요. 마치 애기들이 이뻐서 손가락으로 깨물 때 그냥 꼭 깨물지 못하고 살짝 깨물 듯이 그런 느낌으로 흔들어서 요성을 내요.

 

피리를 불다보면 관대가 동그란데,  소리를 내면서 불다보면 동그란 거 안에 동그란 게 하나 더 있는 듯한 그런 소리가 나요. 그 다음에 피리를 가지고 밀고 땡기고 하는 그런 표현은 다른 악기에선 나질 않죠. 짤막하고 음폭도 좁은 그런 악기에서 어떻게 그런 묘한 소리가 나는지 참 신기해요.“


최경만 명인은 피리가 다른 악기에 비해서 소리가 커서 마음에 든다고 했다. 또 윗주머니에 넣고 다니면 되니까 간편해서 좋다고 했다. 어느 날은 어머님이 공연을 보러 극장에 오셨는데 얼굴이 벌게져서 힘들게 피리를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얘, 영재(피리 하는 김영재 선생 지칭) 좀 봐라, 힘도 안 들고  이쁘게 연주하는데 너는 왜 뼈골 빠지게 힘든 악기를 하느냐’고 핀잔을 주셨다.

 

그러나 최경만 명인은 옛날에 장덕화 선생이 겨울에 공연하러 여의도에 가는데 장구를 들고 서있으니 택시도 안서고 눈보라는 치고 해서 한참을 울었다는 얘기를 하면서 그래도 장구보다는 피리가 나은 편이라고 웃었다.

 

최경만 명인은 피리음악의 보급과 발전을 모색해 보기위하여 한국피리음악연구회를 만들었다. 피리를 한자리에 모아서 같은 소리를 내보자고 만든 것이 벌써 10년이 되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연주회를 가졌다. 이 모임을 통해서 후배들이 뭔가를 할 수 있도록 뒤에서 조용히 밀어주고 있다. 이번 연주회에서도 특별히 경기시나위를 집어넣었다. 옛날에는 판소리도 거뜬거뜬하고 가볍게 갔는데 요즘 시나위는 너무 울어서(계면성을 말함) 탈이라고. 그래서 이번에는 아쟁을 빼고 시나위를 구성했다.

 

최경만 명인이 제일 안타까워하는 것은 서울지역에서 연행되었던 전통 민속음악들이 하나둘 사라지는 것이다. 그것들이 없어지기 전에 원래의 것을 복원해서 후학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그의 꿈이다.

 

고등학교 때 배우고 한번도 연주해 보지 못한 줄풍류와 피리만으로 연주하는 관악풍류도 최경만 명인이 앞으로 해보고 싶은 음악이다. 그러나 연주회 때마다 예산문제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적은 예산을 갖고 연구회를 이끌어 가는 일이 쉽지만은 아닌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피리연구회를 열심히 하다보니 이제는 대금연구회도 생기고 해금, 가야금 연구회도 생겨서 5년 전에는 이들을 묶어 한국음악연구회총연합회를 만들었다.


“ 요즘 젊은 피리주자들은 피리를 참 잘들 해요. 창작곡을 연주하는걸 보면 저희들 이상으로 참 잘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지만 전통음악 연주하는걸 보면 아쉬움이 많아요.

 

전통을 기본 틀로 하고 그 다음에 창작에 눈을 떴으면 좋겠는데 요즘은 악기 시작하면서 흔들면서 부는데..., 그게 달지만 쓴 인삼만 하겠나하는 생각이 들지요. 좀 힘들어도 전통음악의 전반을 공부했으면 하는 바램 이예요. 젊은 층들이 그런데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해서 그 맥을 잇기를 바래요.

 

정악은 나름대로 틀이 있어서 계승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데 민속악은 산조 외에는 잘 계승되질 않고 있어요. 민속악에 산조밖에 없는 줄 알고 있어요. 그런 애들이 있는걸 보면 큰일 났다는 생각이 들지요. 앞으로 40~50대 전공자들이 사라져가는 전통음악을 연구해서 그 밑의 세대에게 계승해 주었으면 해요.“


최경만 명인에게는 젊고 아름다운 부인이 있다. 바로 서도민요의 유지숙 명창이다. 유지숙 명창은 국립국악원에 있을 때 이춘희 선생의 소개로 만났다. 나이차가 좀 있어서 장모님의 하락을 받는데 애로가 많았다. 장모님은 결혼하고 나서도 흡족해하시질 않았는데 최경만 명인은 장모님을 뵐 때마다 용돈을 두둑이 드려서 장모님의 마음을 누그려 뜨렸다. 지금은 제일 인정받는 사위가 되었다고.

 

필자가 인터뷰를 위해 서초동의 연습실을 찾았을 때에도 최경만 명인은 부인의 민요레슨에 방해가 될까 마음을 쓰고 부인은 인터뷰에 방해가 될까 서로 마음을 쓰는 모습이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처럼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최경만 명인은 두 사람을 부부의 연으로 맺게 해준 이춘희 선생에게 늘 마음속으로 고마움을 간직하고 있다. 또 부인과는 같은 음악인으로서 사는 날까지 서로 힘닿는 대로 밀어주고 도움을 주고 싶다고.

 

최경만 명인은 요즘도 스승이신 지영희 선생 생각이 자주 든다. 선경지명이 있으시고 많은 활동을 하실 분이었는데 당시에 여건이 뒷받침되지 못했던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 그 시절에는 선생님이 오선보를 사용하고 관현악에서 지휘를 한다고 해서 욕을 많이 먹었어요. 무슨 음악을 악보를 가지고 하냐고 했지요.

 

그때 선생님이 ‘앞으로 봐라 각 대학에 국악과가 다 생길 것이다. 니들이 공부를 안 하면 이담에 각 대학에서 선생을 구할 때 갈 선생이 없다. 그러니 열심히 공부해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지금 각 대학에 다 국악과가 생겼지 않습니까. 그걸 보면 참 선생님이 생각이 앞서신 걸 느낄 수 있어요.

 

지영희 선생님이 미국에 가시게 된 것도 제가 알기로는, 지영희 선생이 국악을 가르칠 수 있는 전문교수요원을 양성할 학교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국악협회에서는 협회가 있는데 그런 게 뭐가 필요하냐고 해서 법정소송에 들어가게 됐어요. 아무래도 개인이다 보니 소송에 져서 국악 활동을 못하게 제명처분이라는 법적 제재를 받았지요. 그러다보니 방송출연도 못나가고 활동할 수 있는 길이 막히면서 선생님 마음이 흔들렸지요. 그래서 ‘내가 미국 간다. 미국 가서 미국사람에게 국악을 가르쳐서 미국사람에게 국악을 배우게  하겠다.’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그런데 하와이서 무용하는 미국여자가 한국 무용선생이 돼서 한국 학생을 가르치게 됐어요. 그걸 보면서 아, 저럴 수도 있구나 그런 생각을 했죠.

 

지영희 선생님은 한에 맺혀서 그렇게 쫒기 듯 미국에 가셨지요. 가시지 않았다면 국악발전에 큰 기여를 하셨을 텐데 아쉽죠. 지영희 선생님은 활동을 못하시면 서도 매일 피리음악을 악보로 남기는 작업을 하셨어요. 선생님이 남기신 두꺼운 악보집이 있었는데 그것을 책으로 내드리지 못해 아쉬워요.

 

지금도 함께 지방공연을 다니던 생각이 나요. 공연이 끝나면 먹을 것을 잔뜩 구해다 놓고 우리를 부르셨죠. 생간, 천엽 등도 그때 처음으로 먹어봤어요. 옛날 어렵게 공부하던 얘기도 많이 해주시고 ‘니들 세대는 많이 좋아질 거다’라고 늘 강조하셨어요. 결국 머나먼 타국으로 이민을 가시다 보니 모든 것을 접게 되었죠.

 

  저에게 남은 사명이 있다면 지영희 선생님이 못다 하신 것을 조금이나마 제 손으로 마무리를 하고 싶어요.“


전통 민속음악의 부활을 꿈꾸는 최경만 명인, 그는 오늘도 스승이신 지영희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전통 민속음악의 맥을 잇고자 노력하고 있다.



<명인의 애장품>

              

         지영희 선생의 자필악보집


최경만 명인이 늘 애지중지하면서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그의 피리 스승이신 고 지영희 선생님이 손수 자필로 그리신 두 권의 악보집이다.

 

지금은 색이 바래서 누렇게 되고 여기저기 얼룩이 졌지만 양금과 가야금, 거문고보가 오선보로 선명히 그려져 있고 거기에 장단보가 곁들여져 있다. 뒷 표지에는 노트의 제작연도가 1963년으로 되어있고 가격이 천환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이 줄풍류 악보집은 고 지영희 선생님이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최경만 명인에게 주면서 한번 보고 따로 채보를 하라고 주신 것인데, 돌려드리질 못했다가 나중에 책들을 정리하면서 발견하게 되었다.

 

최경만 명인은 스승이 그리워질 때면 늘 이 악보집을 꺼내본다. 악보집이 울긋불긋 얼룩이 진 것도 악보를 보고 피리를 불다가 침방울이 떨어져서 얼룩이 생긴 것이라면서 이 악보집을 볼 때마다 옛날 생각이 많이 난다고 한다. 지금 음반작업을 하고 있는 ‘대영산’ 전 바탕이 음반으로 나오면 그것을 들고 선생님이 묻혀계신 하와이에 건너가서 스승님 무덤 앞에서 꼭 들려드리고 싶다고.

 

고 지영희 선생의 체취가 남아있는, 최경만 명인의 애장품 1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