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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소리인생 50주년 맞는 국악인 안숙선

국악사랑 2007. 3. 21. 01:08
    " 소리인생 50주년 맞는 국악인 안숙선  "
 
 
[경향신문] 2007년 03월 12일
 
국악인 안숙선씨(59)가 올해로 소리인생 50주년을 맞았다. 그는 ‘국악계의 프리마 돈나’라고 불릴 정도로 대중적 인기가 높아 공연 요청도 많다. 올해도 러시아, 미국 등지에서 굵직한 공연들이 예정돼 있다. 하지만 지난 7일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만난 그는 의외로 ‘작은 무대’에 기대를 걸고 있다고 했다. 50주년 기념공연으로 정동극장에서 ‘작은 창극’을 하고 싶단다. 정동극장 객석은 340석. 그는 “창자(소리꾼)의 표정도 보이고, 숨소리까지 들리며, 섬세한 발림(몸짓)도 볼 수 있는 작은 무대가 오히려 감동을 더 줄 수 있다”고 했다. 작은 무대 얘기가 나온 김에 데뷔 50주년 축하 인사도 잊고, 국악계의 아픈 부분을 슬쩍 건드렸다. 문화와 예술은 살아 숨쉬는 생물(生物)이다.

-판소리가 예전에는 생활 예술이었습니다. 요즘은 예술이 아니라 명절 때면 나타나는 옛날 ‘민속’이 돼버렸고, 국악인은 아티스트라기보다는 무형문화재 보유 ‘기능인’이 된 느낌입니다.

“전통 문화유산인 판소리가 사라져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소리꾼들도 그동안 맥을 잇는 데만 열중해온 게 사실입니다. 관객들과 쉽게 친해질 수 있는 대중적인 장르 개발도 부족했습니다. 시대도 변했어요. 요즘 젊은이들은 한문에 익숙하지 않아서 문장 사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러다가 한자보다 영어에 익숙한 관객과 소통하려면 영어로 사설을 해야 되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어요(웃음). 그런데 판소리는 말에 따라 소리와 박자가 달라지는데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작은 무대가 판소리에 어울린다고 하셨는데.

“90년대 후반쯤 뉴욕공연을 할 때였습니다. 당시 400석 정도의 조그만 공연장이었는데 외국인 3~4명을 무대 위로 불러내 앉혔어요. 그 사람들한테 추임새를 가르치고 소리판을 시작했죠. 판소리는 마이크를 쓰는 것보다 창자가 제 목소리로 공연하는 게 가장 좋죠. 소리를 할 때는 자막을 썼지만 사이사이 관객들과 대화를 나눌 때는 통역이 나섰습니다. 예를 들면 ‘목마른데 물 한잔 먹고 합시다’라든지, ‘박수 한번 쳐달라’든지 말이죠. 이게 관객과의 소통이죠. 외국인들도 반응이 좋더라고요. 정동극장은 규모도 적당하고 외국인들도 많이 찾아오는 공연장입니다. 우리 판소리를 알릴 좋은 장소죠.”

-현재 국내에는 판소리를 들려줄 전용공연장이 턱없이 부족하잖습니까.

“판소리 전용공연장은 서울 남산 한옥마을에 딱 하나밖에 없어요. 일본은 자신들의 문화유산을 알리기 위한 공연장, 이를테면 가부키 전용 공연장 같은 것들을 여럿 갖춰 놓고 있거든요.”

그는 ‘교감’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판소리꾼은 득음(得音)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폭포 앞에서 피나는 수련을 하는 등 아티스트가 아닌 무협지의 주인공처럼 그려진다. 작고한 박동진 선생도 생전에 “똥물을 먹고 소리를 얻었다”고 말했던 적이 있다. 판소리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일종의 신비화 경향이 존재하는 셈이다. 그것이 또한 예술과 대중 사이의 소통을 가로막는 ‘벽’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소리꾼들이 너무 신비화돼 있습니다.

“사실 자신의 소리를 찾는 게 쉽지 않습니다. 세월이 걸리는 일입니다. 저도 아홉살 때 데뷔했습니다. 소리 공부를 하다보면 몸이 상할 때도 있습니다. 저도 (목울대의) 실핏줄이 터져서 고생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옛날에는 좋은 약이 많은 것도 아니어서 민간요법에 많이 의존했습니다. (고 박동진 선생은) 그런 어려운 과정을 표현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는 소리공부를 ‘평생수련’으로 표현했다. 그래서 웬만한 끈기가 없으면 국악계에서 버텨내기 힘들다. 이것이 현대에 와서 남자 소리꾼이 적어진 이유이기도 하다. 과거의 판소리 명창들은 대부분 남자였다. 19세기 초반 송흥록, 권삼득 등 전기 8명창, 19세기 후반 박유전, 박만순, 이날치, 김창록 등 후기 8명창, 20세기 전반의 송만갑, 김창룡, 유성준 등 근대 5명창도 남자다. 여류명창의 등장은 일제 때 이화중선 이후부터라고 가늠할 수 있다.

-남자가 부족합니다.

“저도 그게 걱정입니다. 남자들은 결혼을 하면 가정을 이끌어야 해서 떠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먹고 사는 게 중요하니까요. 안타깝죠. 남자라고 해서 기량이 떨어지는 소리꾼을 길러낼 수는 없잖아요. 모두가 문화재가 될 필요는 없고 될 수도 없지만,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나와야 하는데…. (현재 그의 문하에는 100명 안팎의 제자들이 공부하고 있다. 이중 10명 정도가 남자다.)

완창 무대도 꼬집었다. 그는 ‘춘향가’와 ‘흥보가’ ‘적벽가’ 등 판소리 5바탕을 완창한 소리꾼이다. 판소리 한바탕 완창을 하는 것은 물론 ‘대단한 공력’이다. 지금까지 여류명창 중 5바탕을 완창한 사람은 단 2명뿐이다. ‘춘향전’ 한바탕 공연시간만 보통 6시간 이상 걸린다. 소리꾼은 완창무대를 ‘훈장’처럼 여긴다. 하지만 과거엔 완창무대라는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1968년 박동진씨가 최초의 완창자다. 당시엔 중요무형문화재 제도 실시 직후였던 터라 ‘기록’의 의미가 있었지만 과연 지금은 어떤가.

-완창무대가 전문가들에겐 좋은 기회일지 몰라도 일반 청중에게는 너무 부담스럽지 않을까요.

“소리꾼들이 완창을 하게 된 것이 한 30~40여년쯤 되나 봅니다. 완창을 하게 된 것은 마니아가 있기 때문입니다. 완창무대만을 보려고 지방에서 올라오는 관객도 있습니다. 이분들이야말로 진정 우리 소리를 아끼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소리에는 인생 스토리가 모두 담겨 있습니다. 이별도, 슬픔도, 사랑도, 기쁨도 다 녹아있습니다. 이걸 표현하려면 (당대의) 문화도 알아야 하고, 소리도 좋아야 합니다. 어떻게 극적으로 표현해야 하느냐도 관건이죠. 완창은 이런 소리꾼의 재능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완창무대는 판소리 마니아들을 위해서 필요합니다.”

소리인생 50주년 축하를 받을 자리에서 국악계의 문제점만 캐물었더니 그는 덥다며 히터를 껐다. 그래도 대가답게 쪽진 머리는 흐트러짐이 없었고, 얼굴도 밝았다. 미안했다. 한번 들으면 외운다 해서 ‘녹음기’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 났지만, 그는 아직도 쉴틈없이 소리연습을 한다고 한다.

-그동안 고비도 많았을 텐데요.

“처음 서울에 올라왔을 때는 관광공사가 경영하는 워커힐 호텔에서 하루 2차례 공연을 했어요. 쉬는 날이라고는 1년에 딱 하루 설날뿐이었죠. 처음에는 소리에 인생을 걸겠다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79년 국립창극단에 들어선 후 정말 한길을 파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기억에 남는 공연도 많아요. 2000년대 초반 저를 비롯해 5명창이 파리와 뉴욕, 에든버러 등을 돌며 했던 순회공연과 평양공연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유럽공연은 우리 소리를 세계에 알리는 자리였지요. 이후 몇년 후 판소리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습니다. 평양에서 열린 윤이상음악제(98년) 공연도 잊히지 않아요. 당시 김덕수씨가 북장단을 맞추고 제가 소리를 했지요. 판소리는 북한에선 이미 사라져서, 관객들이 처음엔 생소해 했습니다. 판소리는 공연 중 즉흥적으로 농을 던지기도 하는데, 처음엔 관객들이 자신을 놀리는 줄 알더라고요. 나중에는 이해를 하고 즐거워했습니다.”

-국악교육에 남다른 애정이 많으신데.

“국악교육도 중요합니다. 아이들에게 국악을 피아노 치듯이 가르칠 방법은 없을까 고민도 합니다. 국악인들도 앞날을 진지하게 생각해 볼 때입니다. 또 고향 남원에 판소리기념관을 하나 세우고 싶습니다. 남원은 동편제의 발상지거든요. 명창들도 많이 배출된 곳입니다. 그리고 힘이 다할 때까지 소리를 해야지요. 소리를 하다 죽는 게 꿈입니다. 바로 이곳 국립극장에서요. 여기가 저를 키워준 곳이니까요.”

안명창과의 인터뷰는 3시간 가까이 걸렸다. 말만 많이 해도 지쳐, 공연을 앞두고는 귀여운 손자들도 가까이 하지 않고 쉰다는 그는 인터뷰가 끝나자 사진기자에게 사진을 다시 찍어보자고 했다. 한복을 안입고 왔으니 집에 가서 의상을 갖추고 찍자는 것이다. 50년 동안 곁길로 새지 않고 달려온 프로답다.

〈글 최병준·사진 정지윤기자〉

안숙선은 누구

안숙선의 집안은 국악 명가(名家)다. 9세때 처음 가야금을 가르쳤던 이모 강순영은 가야금 명인, 소리를 가르쳤던 외당숙 강도근은 동편제의 거목이었다. 중요무형문화재 대금 산조기능보유자인 강백천도 어머니의 사촌이다.


친지들로부터 소리와 가야금 등을 배웠던 그는 스승복도 많았다. 명인 주광덕에게 기초를 배운 뒤 학생 명창대회를 휩쓸었다. 남원여고를 졸업한 뒤 상경, 명창 김소희 문하에 소리공부를 했다. 이후 박봉술, 정광수, 성우향 등 명창급 소리꾼을 스승으로 모셨다. 박귀희 선생에게는 가야금 병창을 배워 1997년 49세에 그의 뒤를 이어 중요무형문화재 23호 가야금 병창 기능보유자가 됐다. 대한민국문화예술상(1993년), 프랑스 예술문화훈장(1998년), 옥관문화훈장(1999년)을 수상했다. 97년부터 2005년까지 두차례에 걸쳐 국립창극단 단장을 역임했다. 현재 전주세계소리축제 조직위원장이다.